음악듣기/Joan Baez

[스크랩] 존 샨도스 바에즈(Joan Chandos -

Sidonio 2006. 12. 15. 12:23
자유와 민권을 노래한 프로테스탄트 포크의 여왕

                                                            - 존 샨도스 바에즈(Joan Chandos Baez
1941.1.9~)


                  ......... 누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과 가수를 말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Joan Chandos Baez 와 Bob Dylan 의 Blowing In The Wind이라 말할 것이다.
                 그들은 음악으로 평화와 反戰, 人權 그리고 철학을 노래해왔고 몸으로 평생을 실천해 왔다.  
                 특히 Joan Chandos Baez는 그의 지성적 풍모에서 무한한 매력을 참을 수 없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름다워지는 여자, 60년대 부터 좋아한 3살 연상의 여자 .......................



              어린 시절의 존 바에즈. 그녀는 핵물리학자인 아버지와 희곡작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멕시코 계라는 이유로 많은 차별 속에 성장했다.



                                     당신은 자신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선택할 수 없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 존 바에즈


                                    "브로드웨이에 죽치고 앉아 '나는 사랑에 빠졌어요'
                                     따위의 노래를 만드는 이들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허나 세상엔 사랑과 섹스 말고도 중요한 것이 존재하는 법입니다." - 밥 딜런










    존 바에즈. 나는 그녀의 이름을 입 밖으로 소리내어 부르기 전에,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며칠 밤을 커피만으로 지샌 사람처럼 가슴이 벌렁거린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팝스타들을 따라다니는 어린 소년, 소녀들은 있기 마련인데 우리나라는 이들을 가리켜 오빠부대라 하고, 영어권에선 이런 사람들을 그루피(groupie)라고 한다. 존 바에즈, 그녀를 위해서라면 난 언제라도 이런 사람으로 분류되고 싶다. 정(情) 중에는 첫정이 제일 무섭다고 하던가. 나는 존 바에즈를 통해 '머리 올린 어린 기생'이라도 된 심정이 들곤 하는 것이다. 이제사 고백하지만 존 바에즈는 뮤지션에게 바쳐진 나의 첫사랑이자, 어린 가슴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던 소년 시절의 첫사랑이기도 했다. 나는 대학로 어느 LP가게에서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녀의 골든 프라이즈 앨범(Golden Prize Album/ Vangard) 2장을 사고는 차비가 없어서 집까지 비를 쫄딱 맞고 걸어간 적이 있다. 집까지 가는 내내 그녀의 앨범이 비에 젖을 세라 가슴에 꼭 품고 가는 동안 단언컨대 그녀의 앨범엔 단 한 방울의 빗물도 튀기지 않도록 했다고 장담할 수 있다. 이 홈피에서 뮤지션의 일대기를 이야기할 때마다 턴테이블 이야기를 하는데, 그 무렵의 나는 턴테이블이 없어서 LP를 사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앨범에서 나온 부클릿(영문으로 되어 있었지만)을 보며 혼자 영어사전을 펼쳐놓고 행복한 마음으로 해석한 적이 있다.

  혼자만의 짝사랑을 고백하는 것 같아 부끄러울 지경이긴 하지만, 나는 존 바에즈의 노래를 듣노라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처연하면서도 기품이 있고, 윤기가 흐르면서도 거만하게 들리지 않는, 쥐어짜는 음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힘차게 부르는 노래에도 편안하게 기댈 수가 있다. 어쩌면 나는 그녀의 노래에 나의 거친 욕망과 다듬어지지 않은 이상을 덧칠했는지도 모른다. 1941년 생인 그녀의 나이도 우리 나이로 어느새 60 환갑이 지났지만 나의 머릿 속 그녀는 여전히 검은 머리를 흩날리며 깊게 패인 눈동자로 세상을 응시하는 그런 아티스트로 남아 있다.



    포크 음악의 마돈나, 존 바에즈의 성장기

   존 샨도스 바에즈(Joan Chandos Baez)는 1941년 1월 9일 미국 뉴욕의 스태이튼 아일랜드(Staten Island)에서 멕시코 출신의 물리학자인 아버지 알베르트 바에즈(Albert Baez)와 스코틀랜트 출신의 어머니 존 브릿지 바에즈(Joan Bridge Baez) 의 세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희곡 작가이자 교사였고, 아버지는 물리학자이자 유네스코(UNESCO)의 콘설턴트 일도 맡아 미국은 물론 전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연구하는 일을 해야했기 때문에 어린 존 바에즈는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일이 많았고, 한때는 아버지를 따라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살기도 했다. 그녀의 부친은 물리학자로 MIT 등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초빙되는 교수였지만, 멕시코계라는 이유로 존 바에즈는 인종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핵물리학자로 여러 방위산업체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는 유능한 인재였지만 핵무기에 반대했기 때문에 이런 제의를 거절했다. 존 바에즈가 반전평화운동가이자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게 된 데에는 이런 아버지의 영향과 가정적 환경도 컸다고 할 수 있다.

   존 바에즈가 음악에 대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캘리포니아 팔로 알토(Palo Alto)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14살 무렵의 일이었다. 그녀는 합창반에서 노래를 했고, 1956년엔 그녀만의 첫 기타를 구입해 이곳에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시민불복종 운동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해의 일이었다. 이듬해인 1957년엔 간디주의 철학자인 아이라 샌드펄(Ira Sandperl)을 만나 그녀로부터 강한 정치적 영향을 받았다. 1958년 존 바에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자신의 데모 음반을 제작해 음반사에 보내지만 레코드 취입을 거절당하고, 아버지가 MIT와 인근의 몇 개 대학에서 강의하게 되자 아버지를 따라 매사추세츠주의 벨몬트로 이사한다. 보스톤 대학에 등록한 그녀는 학업보다는 자신의 뮤지션 경력을 꽃피우는 데 치중했다. 그녀는 처음엔 보스턴과 케임브리지 지역의 작은 클럽들에서 노래했는데, 곧 그리니치 빌리지로 옮겨 갔다.

   그녀가 정식으로 무대에 데뷔한 것은 1959년 캠브리지의 포크 음악 클럽인 '클럽 47'에서였다. 존 바에즈는 이곳에서 빌 우드(Bill Wood)를 만났고, 얼마후엔 테드 알레비조스(Ted Alevizos)까지 합류하여 앨범 지의 커버스토리로 실리게 된다. 1955년 알라바마주 몽고메리시에서 발생한 흑인들의 버스승차거부운동은 곪아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던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철폐와 흑인 공민권 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좀더 자세한 사항은 <유리병편지> 79호를 참조하시길). 여기에 앞장 선 사람이 간디의 비폭력노선을 추구한 마틴 루터 킹 목사였다. 존 바에즈는 1963년 3월 25만 명의 민중과 함께 인종차별 철폐와 흑인 공민권 확대를 요구하며 워싱턴 D.C까지 이어지는 거리 행진에 참여했고, 이들 앞에서 <우리 승리 하리라(We Shall Overcome)>을 노래했다. 이 해 8월엔 노예해방 선언 백주년을 기념하는 워싱턴 대행진이 있었고, 이 자리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너무도 유명한 연설의 서두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을 말했다. 이 행진엔 존 바에즈, 밥 딜런, 피터 폴 앤 매리, 해리 벨라폰테, 마할리아 잭슨 등의 쟁쟁하고 의식있는 뮤지션들이 함께 했다.그러나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달라스에서 암살당하고, 부통령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1965년은 존 바에즈에게 그리고 미국에게도 매우 중요한 해였다. 그녀는 1965년 5월 17일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 포크 페스티벌에 밥 딜런과 함께 출연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6월 17일 미국의 B-52 폭격기가 북베트남을 대대적으로 폭격하며 베트남전은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의 전면전이 되었다. 같은 해 7월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엔 밥 딜런과 존 바에즈는 물론 피트 시거(그는 50년대 '위버스weavers'를 이끌며 학생 포크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매카시즘 선풍 때 공산당으로 몰리기도 했다), 미시시피 존 허트, 잭 엘리엇, 이안 앤 실비아, 탐 팩스턴, 필 오크스 등 당대의 기라성같은 포크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하는 행사였다. 밥 딜런은 존 바에즈의 음악에 많은 영향과 도움을 주었고, 존 바에즈의 노래는 대중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녀의 노래들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나가기 시작해 포크 음악이 배출한 여성 아티스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뮤지션이 되었다. 베트남전이 격화되면서 미국 정부는 막대한 전비를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존 바에즈는 자신의 수입 중 60%가 베트남 민중을 죽이는 총탄과 포탄이 되는 세금으로 원천징수된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그녀는 세금 징수에 불복했고, 존슨 대통령에게 베트남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존 바에즈는 자신의 주장을 좀더 널리 알리기 위해 흑인 공민권 확대를 위한 콘서트와 반전 등 여러 현장에서 무료로 공연하며 자신의 의지를 실천으로 옮겼다. 이 해 연말 존 바에즈의 앨범은 그래미상의 '베스트 포크 레코딩' 부문 수상 후보작이 되었다



   이 해 존 바에즈는 밥 딜런과의 연인 관계를 끝냈다.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의 관계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이 두 사람은 포크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저항 정신을 실천한 운동가였다.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은 당시 미국 사회의 여러 모순들 - 인종차별, 베트남전, 세대간의 갈등 등 - 을 저항과 리얼리즘의 정신으로 담아냈고, 삶에 대한 열의와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고자 했던 청년 문화의 대변인이었다. 물론 존 바에즈에게 끼친 밥 딜런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밥 딜런을 가장 중요한 포크 뮤지션으로 주목받도록 한 사람이 존 바에즈란 사실도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뉴스위크>지는 "포크송의 여왕 존 바에즈가 밥 딜런을 왕자로 책봉했다"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밥 딜런은 존 바에즈에게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도록 했고, 포크 음악이 지향하는 바에 대해서 서로 많은 교감을 이루었다. 그러나 존 바에즈는 프로테스탄트 포크라는 포크 음악의 순수함을 밥 딜런보다 더 오래 지켜나갔고, 포크 음악의 대중화란 측면에선 밥 딜런보다 더 많은 공로를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억압받는 자의 노래하는 교사. 존 바에즈


   '진보'를 "강한 자에겐 강하고, 약자에겐 약한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존 바에즈만큼 이런 진보의 정신에 충실했던 뮤지션은 드물 것이다. 그녀의 노래는 늘 힘없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그들을 각성하게 만들었다. 가난한 이민자들로 대표되는 사회적 소수의 정서를 노래에 담았고, 잊혀진 그들의 권리와 상실된 권리를 찾도록 부추겼다. 그녀의 노래는 소외받는 민중들의 위안이자 실탄이 되었다. 1960년대의 미국 정부는 국민 위에 군림하는 정부였고, 국민 대다수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을 지속시켰다. 더군다나 그 전쟁은 미국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불의의 전쟁이었다. 1966년 봄 그녀의 초기 앨범 3장이 미국 레코드 산업협회(RIAA)로부터 골든 앨범으로 인정받았다. 존 바에즈는 시종일관 약자 편에 서서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반전시위 현장에서 흑인의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쉬지 않고 노래했고, 시위에 직접 참여했다.

  존 바에즈는 미국 사회의 보수층을 적으로 돌리고 있었다. 1967년 일본 공연에서 그녀의 정치적 발언이 의도적으로 오역되는 일이 일어났고, 당시 그녀의 통역자는 CIA요원으로부터 존 바에즈의 정치적 발언들을 오역하도록 압력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CIA는 이런 사실을 부인했다. 일본 공연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예정되었던 워싱턴 컨스티튜션 홀에서의 공연을 열 수 없었다. 미국 독립전쟁 유공자의 자손들 모임인 DAR(the Daughters of the American Revolution)이 그녀의 반전운동을 문제삼아 공연허가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러나 존 바에즈는 이들의 공연허가 거부에도 불구하고 즉석에서 3만여 명의 청중이 모인 워싱턴 기념비 앞에서 무료로 콘서트를 개최했다. 존 바에즈의 확인되지 않은 일화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그녀의 허가되지 않은 공연을 방해하기 위해 경찰관이 야외공연의 필수인 앰프와 마이크 사이의 연결되는 코드를 모두 빼앗자, 존 바에즈는 무대에서 내려와 청중들 한 가운데 자리잡고 노래했다. 청중이 그녀의 노래에 호응해 함께 노래를 하자 경찰이 압수했던 공연 장비를 어쩔 수 없이 돌려주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존 바에즈의 행동은 미국의 보수 우익들에겐 눈엣가시와 같았다. 그러나 존 바에즈는 이들의 증오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이 해 10월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 있는 군 입소대 입구를 무단으로 점거하기까지 했다. 그로 인해 10일간의 형을 받기도 했다.

  1968년은 그렇게 밝아왔다. 68혁명에 참여하기도 했던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은  "이제껏 세계 혁명은 단 둘 뿐이었다. 하나는 1848년에, 또 하나는 1968년에 일어났다. 둘 다 역사적인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둘 다 세계를 바꿔놓았다"고 말한다. 존 바에즈는 이 해 3월 26일 팔로 알토의 평화와 자유 공동체의 리더이자 행동가인 데이빗 해리스와 결혼한다. 68혁명에 대해서는 앞으로 별도의 장에서 다룰 기회가 있겠지만 이 한 해에는 정말 엄청난 일(프라하의 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 등)들이 일어났고, 그 전해에 죽은 체 게바라는 1968년의 젊은이들이 숭배한 주요 영웅들(마오쩌뚱, 호치민, 두브체크와 같은 인물들) 중에서도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다. 젊은이들은 서구의 근대합리주의 문명이 창출해낸 모든 권위에 저항했고, 부인했다. 그들은 기존의 사회 체제들, 근대적 합리주의와 그것이 낳은 관리 사회, 인간 소외의 구조를 파시즘(전체주의)과 동일한 의미로 파악했고, 기성 세대의 권위를 깡그리 짓밟고자 했다. 미국에서 청년들은 징집 영장을 공공연히 불태웠고, 프랑스에서는 바리케이트를 넘어서며 해방을 외쳤다. 그들은 모든 금기들 '정치적·사회적·성적 금기 등 모든 금기'에 대해 도전하고, 저항함으로써 혁명을 성취하고자 했다.



  추락하는 순수의 시대와 마지막 생존자, 존 바에즈

   1969년 그녀의 남편 데이빗 해리스가 징병 기피 혐의로 3년형을 선고 받았고, 20개월을 복역하게 되었다. 존 바에즈는 남편이 감옥에 있는 동안 남편에게 바치는 을 발표했고, 8월에는 역사적인 우드스탁 페스티벌(The Woodstock Festival)에 참가했다. 그렇게 1960년대가 저물고 있었다. 진보의 목소리가 세상을 뒤엎을 것 같았던 60년대가 지나고 1970년대가 되자 세상이 돌연 잠잠해졌다. 3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3일간의 음악, 평화, 사랑의 제전'을 제창한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성공은 60년대라는 시공간이 쌓아올린 금자탑이자 동시에 정점이었다. 그 이후엔 끝을 알 수 없는 '순수의 추락'이 이어졌다. 같은 해 10월 샌프란시스코 인근에서 열린 앨터몬트 페스티벌에서는 롤링 스톤스 공연 때 '지옥의 천사들(Hell's Angel)' - 인근의 악명높은 폭주족들이 경비를 절감한다는 이유로 맥주값 500달러에 행사진행 및 안전요원으로 채용되었다 - 공연을 관람하던 흑인 관객을 칼로 찔러 죽였다. 이듬해인 1970년엔 지미 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도어즈의 짐 모리슨이 약물로 인해 사망했고, 올맨 브라더스의 듀언 올맨, 더 버즈의 클라렌스 화이트 등이 교통사고로 숨졌다.

  록의 혁명성과 포크의 순수를 믿었던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록은 상업주의의 포로가 되었고, 포크 음악은 활로를 찾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밥 딜런은 어쿠스틱 기타를 버리고 일렉트릭 기타를 짊어졌고, 그의 노래에선 더 이상 '우리'란 말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나'라는 개인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 그러나 존 바에즈는 이런 시기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침묵하지 않았다. 1971년 10월 그녀는 군사정권 아래에서 신음하는 그리스 저항운동을 돕기 위한 콘서트를 열었고, 그 자리엔 그리스 최고의 여배우이자 역시 뛰어난 자유의 투사였던 멜리나 메르쿠리(Melina Mercouri)와 그의 남편이자 영화감독 쥘 다생(Jules Dassin) 참여해 화제가 되었다. 그녀는 뱅가드 레이블을 떠나 A&M으로 옮겨갔고, 이제 그녀의 음악형식도 뱅가드 시절의 전통 포크의 모습에서 새로운 음악스타일로 옮겨 가게 되었다. A&M시절 그녀의 최대 명곡인 는 1972년 4월에 발매되었다. 1973년엔 국제인권사면위원회 엠네스티(Amnesty)의 기금 마련을 위한 활동을 했고, 1975년 10월부터 이듬해까지 밥 딜런 등과 함께 전미투어를 했다. 76년엔 자신의 자작곡만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앨범 를 발표했다. 그녀는 1977년 독재자 프랑코의 지배 아래있는 스페인을 방문해 TV 생방송 중 40여년 전부터 금지곡이었던 을 노래했다.

  존 바에즈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그 어떤 위험도 무릎썼다. 그녀는 베트남의 하노이, 북아일랜드, 튀니지, 아르헨티나, 레바논에서 노래했고, 억울하게 구금당한 사람의 사면을 위해서 노래했다. 그녀는 노래하고 또 노래했다.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반체제 인사였던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를 위해 노래했고, 캄보디아를 위해 노래했다. 이런 그녀의 활동을 인정한 안티오크 대학과 루트거스 대학에선 그녀의 정치적 행동과 음악성을 인정해 명예인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존 바에즈는 레이건 집권 이후 더한층 강화된 미국의 보수주의 물결 속에서도 1981년 라틴 아메리카에서 5주간의 콘서트와 인권 실태조사 여행을 강행한다. 여행 도중 그녀는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았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지만 이 모든 일을 끝까지 해냈다. 또한 그녀는 핵무기 제조 및 사용 중지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1983년 유럽을 순회공연했고, 프랑스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파리의 비폭력주의에 바치는 무료 콘서트를 개최해 12만 명의 군중 속에서 노래해 프랑스 최고의 명예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녀의 이런 활동들은 가장 최근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멈춘 적이 없었다. 존 바에즈는 한때 1 년공연의 개런티로 10만불을 제시한 프로모터의 제안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포크음악은 의식에 관여하는 음악이다. 누구든 그것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포크음악이라고 말할수 없다."







   존 바에즈와 포크음악

  나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상업화된 록 음악에 애써 혁명성을 덧칠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려는 일부 음악 평론가나 지식인의 행동은 일종의 코스츔에 불과하단 생각을 하고 있다. 또한 운동가요 혹은 민중가요가 예전의 효용을 되찾기 위해 록음악의 형식을 띄는 것, 저녁 시간에 청춘 문화의 상징 어쩌구 하면서 다 늙은 포크송 가수들이 나와 과거의 낭만 타령을 하는 방송을 지켜봐야 하는 일이 다 비슷한 일들로 여겨진다. 밥 딜런이 어쿠스틱 기타를 포기했다는 사실보다는 그가 일렉트릭 기타를 이용해 만든 음악의 내용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록음악이란 형식을 이용한 음악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실천의 무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또한 서구의 음악적 환경과 사회적 배경이 우리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을 일삼아 주장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록음악을 좋아하는 개인적인 이유는 될지 언정 그다지 책임있는 비평행위라고 보기 어렵다. 우리는 지난 1980년대 '운동가'라는 형식을 띈 여러 형태의 음악들을 만났다. 이중 일부는 현재까지 즐겨 노래하게 되는 명곡으로 살아남은 것들도 있지만 현재는 예전에 비해 그 중요성이 많이 반감된 것도 사실이다. 이 자리에서 그런 음악의 부흥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밀접한 현장에서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음악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Blowing In The Wind - Joan Baez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Before you call him a man
How many seas must the white dove sail
Before she sleeps in the sand
And how many times must the cannonballs fly

Before they are forever banned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How many years can a mountain exist
Before it washed to the sea
How many years can some people exist
Before they're allowed to be free
And how many times can a man turn his head
And pretend that he just doesn't see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How many times must a man look up
Before he can see the sky
How many ears must one man have
Before he can hear people cry
And how many deaths will it take till he knows

That too many people have died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 봐야
진정한 인생을 깨닫게 될까요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 위를 날아 봐야
백사장에 편안히 잠들 수 있을까요
전쟁의 포화가 얼마나 많이 휩쓸고 나서야
세상에 영원한 평화가 찾아올까요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요
그건 바람만이 대답할 수 있답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높은 산이 씻겨 내려 바다로 흘러갈까요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사람들은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요
언제까지 고개를 돌려
모르는 척할 수 있을까요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요
그건 바람만이 대답할 수 있답니다
얼마나 많이 올려다보아야
진짜 하늘을 볼 수 있을까요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야
다른 사람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야
무고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음을 깨달을까요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요
그건 바람만이 대답할 수 있답니다










DiamondsAndRust




          Joan Baez Story - II


                                       "브로드웨이에 죽치고 앉아 '나는 사랑에 빠졌어요'
                                        따위의 노래를 만드는 이들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허나 세상엔 사랑과 섹스 말고도 중요한 것이 존재하는 법입니다." - 밥 딜런






 존 바에즈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미국과 영국의 전통 민요와 발라드, 그리고 종교적인 내용을 담은 흑인 영가와 백인 영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녀의 초기 앨범들은 대부분 17세기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 영국, 또는 미국의 서민층에서 널리 불려졌던 노래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가 차용한 이러한 포크(Folk) 음악들은 동시대 사람들(Folk)에 의해 불려진 시대의 정서와 삶의 애환, 꿈과 이상이 생생히 담긴 지극히 인간적인 노래들이다. 그녀에게 있어 음악이란 삶의 순수한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그릇이며 개인은 물론 집단 의식의 총체적 표출을 가능케 하는 이상적인 도구였다. 때문에 그녀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한 투쟁의 장을 가장 인간적인 향취가 물신 풍기는 포크 음악을 통해 펼쳐보일 수 있었다.

그녀의 음악에서 기교적인 면은 찾아볼 수 없다. 잔잔한 어쿠스틱 기타의 반주에 실리는 하이톤의 소프라노 보컬은 지극히 단조롭지만 동시에 따스한 영적 에너지로 충만한 기운을 가득 내뿜는다. 이것은 바로 그녀 음악의 가장 큰 매력이자 힘이다. 그녀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그 영혼의 울림에 동화되며 그 안에서 스며나오는 강한 메시지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국내에서 존 바에즈라는 이름을 널리 알리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The River In The Pines'나 'Donna Donna', 'Mary Hamilton' 등의 전통 발라드에서 60년대 저항운동의 찬가 'We Shall Overcome', 그리고 'Poor Wayfaring Stranger'와 'Diamonds & Rust' 등에 이르는 수많은 명곡들에서 얻을 수 있는 강한 친화력과 포근히 가슴을 감싸오는 매력은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존 바에즈는 41년 1월 9일 뉴욕의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존 샨도스 바에즈(Joan Chandos Baez)라는 본명으로 태어났다. 멕시코인인 그녀의 아버지는 물리학자였고, 스코틀랜드인 어머니 역시 희곡을 가르쳤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가족들이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로 이사함에 따라 그녀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의 몇 년간을 보내야 했고,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생활했다. 캘리포니아의 팔로 알토에서 보낸 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합창단에서 노래를 했으며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56년, 비폭력주의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2세의 강의를 들은 그녀는 그의 사상에 큰 감명을 받게 되었고, 이듬해에 만난 간디주의 철학자 아이라 샌드펄은 이후 그녀의 정치적 성향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58년 MIT에서 강의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가족은 메사추세츠주로 이사를 하는데, 그녀가 아버지를 따라가서 보았던 보스톤의 한 커피하우스에서의 포크 공연은 결국 그녀를 포크 뮤지션의 길로 인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보스턴과 케임브리지 지역은 우디 거스리와 피트 시거, 오데타 등에 의해 새로운 부흥을 이루게 된 포크 음악의 중심지였고, 보스턴 대학에 입학하여 희곡을 공부하던 그녀는 전공 수업보다는 그곳의 포크 뮤직 씬에 강한 관심을 보이며 지역의 커피하우스와 클럽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존 바에즈가 정식으로 노래와 연주를 시작한 것은 이듬해인 59년 케임브리지의 포크뮤직 클럽인 '클럽 47'에서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포크 뮤지션인 빌 우드를 만나 곧 함께 공연을 하기 시작했고, 얼마 후 빌과 테드 알레비조스라는 뮤지션과 함께 앨범 [Folksingers 'Round Harvard Square]를 발표하며 레코드 데뷔를 이루었다. 공연 기획자인 알버트 그로스만의 눈에 띈 그녀는 시카고의 유명한 포크 클럽인 게이트 오브 혼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2주간의 그 공연은 그녀의 생에 있어 중요한 기회 중 하나였다. 그녀의 재능을 눈여겨보았던 포크 싱어 밥 깁슨이 같은 해 7월 11일 개최된 제 1회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그녀를 자신의 백업보컬로 세운 것이다.

존 바에즈의 예정되지 않았던 출연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그녀의 재능은 쉽사리 눈에 띄었다. 결국 그녀는 이듬해인 60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정식으로 참여하였고, 포크/블루스 전문 레이블인 뱅가드와 12년간의 계약을 맺는다. 이 계약기간 동안 그녀는 여덟 장의 골드 앨범과 한 장의 골드 싱글을 기록하며 60년대의 포크 씬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그녀의 동생인 미미 바에즈(Mimi Baez) 역시 이후 남편인 리처드 파리냐와 함께 듀엣 미미 앤 리처드 파리냐를 결성하여 활동하며 인기를 얻었다).







61년 4월, 존 바에즈는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저즈 포크 시티에서 처음으로 밥 딜런을 만났다. 이후 2년 이상의 기간 동안 자신의 숱한 콘서트를 통해 딜런을 여러 차례 소개했고, 이 두 연인들은 곧 60년대 미국 포크 씬의 거대한 기둥으로 자리잡는다.

61년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한 바에즈는 곧 첫 전국 콘서트 투어에 들어갔는데, 그녀는 이 콘서트를 통해 반 인종차별주의와 흑인의 공민권을 위한 정책을 주장했다. 이 투어는 62년 10월 [In Concert]라는 타이틀로 발매되어 앨범 차트 10위를 기록한다. 이 앨범은 이듬해 그래미 어워즈에서 '베스트 포크 레코딩' 앨범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하였다. 62년 11월 23일자 [타임]지의 커버스토리에 실린 그녀는 이미 사회적으로 커다란 관심을 받는 인물이었다.

63년 5월 17일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에서 개최된 제 1회 몬터레이 포크 페스티벌과 7월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그녀는 밥 딜런과 함께 출연했다. 피트 시거, 미시시피 존 허트, 잭 엘리엇, 이안 앤 실비아, 탐 팩스턴, 필 오크스 등 당대를 대표하는 많은 포크 뮤지션들이 참여한 이때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실황은 [Newport Broadside]와 [The Evening Concert Vol. 1]으로 발매가 되는데, 이 앨범들은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이 함께 등장하는 유일한 작품으로 기록된다. 같은 해 8월, 워싱턴에서 있었던 흑인 공민권을 위한 데모 행진에서 그녀는 25만의 청중 앞에서 'We Shall Overcome'을 불렀고, 이 곡은 곧 싱글로 발매되어 미국 차트 90위와 65년 영국 차트 26위에 올랐다.

밥 딜런이 라이너 노트를 쓴 [In Concert, Part 2](63)는 미국 차트 7위에 올랐고, 6개월 후에는 영국 차트 8위를 기록한다. 특히 이 작품에는 버밍햄의 마일즈 대학에서 녹음된 저항가요 'We Shall Overcome'이 수록되어 있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을 위한 군비 증강의 일환으로 높은 세금을 거두고 있었는데, 수입의 60%를 원천징수 세금으로 빼앗기게 된 존 바에즈가 거기에 불복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이에 저항하는 시위는 물론, 텍사스에서 있었던 반인종차별주의 시위에 참여한다. 그 외에도 그녀는 존슨 대통령에게 베트남에서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촉구하고 흑인 공민권을 위한 자선 콘서트에 참여하는 등 저항의식을 가진 실천가와 영혼의 음악을 들려주는 포크 뮤지션으로서의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완전한 어쿠스틱 앨범으로서는 마지막이 될, 그리고 영국 차트 3위에 오름으로써 영국에서의 최대 히트작인 된 [Joan Baez 5]가 발매되었고, 그녀의 애창곡 66곡과 에릭 폰 슈미트의 삽화가 곁들여진 베스트 셀러 [The Joan Baez Songbook]이 출간되었다. 앨범에 수록된 필 오크스의 곡 'There But For Fortune'은 대중적인 히트를 기록했고, 65년의 그래미 어워즈에서 '베스트 포크 레코딩'에 노미네이트 된다.

65년 봄 바에즈와 딜런의 연인 관계는 끝을 맞이했고, 5월에는 미국 밖에서 행해진 최초의 큰 공연인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의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런던에 머무르는 동안 그녀는 도노반과 함께 베트남전 반대 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되는 [Farewell, Angelina]가 발표되었다.

66년 초, 그녀의 초기 세 장의 앨범들이 미국 레코드산업협회(RIAA)로부터 골드로 인정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반전 시위와 흑인의 인권을 위한 운동에 가담하고 있었으며, 크리스마스에는 64명의 사형선고자들의 감형을 촉구하는 철야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67년 일본 공연에서는 그녀의 정치적 발언이 의도적으로 오역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통역자는 그녀의 정치적 언급을 오역하도록 CIA 요원으로부터 압력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철회하였고 CIA 측은 이 일과의 연관을 부인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예정되었던 워싱턴시 컨스티튜션 홀에서의 공연을 열 수 없었다. 그녀의 극렬한 반전운동 경력 탓이었다. 독립전쟁 참가자의 자손들 모임인 '미국애국부인회'에서 그녀의 공연 허가를 거부했던 것이다. 하지만 존 바에즈는 30,000여 명의 청중이 모인 워싱턴 기념비 앞에서 무료 콘서트를 개최함으로써 멋지게 응수했다. 7월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참여한 그녀는 이어 8월에 새로운 앨범 [Joan]을 발표한다. 10월에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군 입소대 입구를 점거한 혐의로 체포되어 10일간의 형을 받기도 했다.

68년 3월 26일, 존 바에즈는 캘리포니아주 팔로 알토의 평화와 자유 공동체 리더이자 행동주의자인 데이빗 해리스와 결혼했다. 이후 그녀의 회고록 [새벽(Daybreak)]가 출간되어 베스트셀러를 기록한다.

69년, 데이빗 해리스가 징병 기피로 3년형을 선고받았고 그는 20개월을 복역해야만 했다. 존은 감옥에 있는 남편에게 바치는 [David's Album]을 발표하여 차트 36위에 올렸고, 8월에 있었던 역사적인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71년에는 그녀와 데이빗이 함께 쓴 책 [Coming Out]이 출간되었으며 사운드트랙 앨범 [Carry It On]이 발매된다. 10월 그녀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그리스의 저항운동을 위한 콘서트를 열었는데, 거기에는 그리스의 유명한 영화감독인 쥘 다생과 그의 아내이자 그리스 최고의 여배우인 멜리나 메르쿠리가 참여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또 다른 사운드트랙 앨범 [Sacco And Vanzetti]는 존과 이탈리아의 유명한 영화음악가인 엔니오 모리코네가 함께 작곡한 작품이었다. 이후 뱅가드 레이블에서의 마지막 앨범인 [Blessed Are..]가 발매되었고, 밴드(Band)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싱글 '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이 차트 3위에 오르며 밀리언셀러를 기록한다. 72년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최고의 여성 보컬리스트로 노미네이트 되었다.

뱅가드 레이블을 떠난 그녀의 새 보금자리는 A&M이었다. 뱅가드 시절의 전통 포크의 모습은 이제 많은 변화를 겪었고 그녀의 음악 스타일 또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72년 5월 A&M에서의 첫 앨범 [Come From The Shadows]는 미국 차트 48위에 오른다. 앨범에서 커트된 싱글 'In The Quiet Morning'은 그녀의 동생 미미 파리냐의 작품으로 재니스 조플린에게 바치는 곡이었다. 이 곡은 차트 69위를 기록한다.

74년 스페인어로 부른 앨범 [Gracias A La Vida]가 발매되었다. 앨범 발매 후 그녀는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 이스라엘, 레바논, 튜지니아, 아르헨티나 등을 포함한 세계 투어에 들어간다. A&M 시절의 최고작인 [Diamond & Rust]는 72년 4월에 발매되었다.

조지아 주의 아틀랜트시는 8월 2일을 '존 바에즈의 날'로 정하고 그녀에게 영예를 주었다. 그녀는 75년 10월부터 밥 딜런과 믹 론슨, 로저 맥귄, 자니 미첼 등으로 이루어진 롤링 썬더 리뷰와 함께 미국 투어를 시작하여 이듬해에 발표된 더블라이트 세트인 [From Every Stage]로 결실을 맺는다.

76년 말, 그녀의 자작곡으로만 이루어진 최초의 앨범 [Gulf Winds]가 발매되었고 밥 딜런과의 두 번째 투어를 시작한다. 이듬해의 스페인 투어 도중 그녀는 40년간의 군부독재의 종말을 코앞에 둔 독재자 프란치스코 프랑코의 금지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TV 생방송에 출연하여 'No Nos Moveran(We Shall Not Be Moved)'를 불러 화제가 되었다.

79년, 그녀의 자작곡과 직접 그린 스케치들이 담긴 책 [The Songbook And Then I Wrote...]가 출간되었다. 같은 해 [Honest Lullaby]가 발매되었고, 그녀는 샌프란시스코만 지역 음악 시상식에서 78년 최고의 여성 보컬리스트로 선정되었다. 그해 그녀는 인권기구인 인본주의 국제인권위원회를 설립하고 이후 13년 동안 회장직을 맡아 활동한다. 위원회의 첫 번째 행동은 미국 내 다섯 개의 메이저 신문에 베트남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권탄압의 내용을 규탄하는 내용의 글을 게재하는 것이었다. 이 위원회와 KRON-TV,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신문은 캄보디아 긴급 구조 기금을 결성하여 100만 달러 이상의 기금을 모았다.

바에즈는 80년 정치적 행동과 음악의 보편성으로 앤티오크 대학과 루트거스 대학에서 명예인문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같은 해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파리 노트르담 사원 앞에서 무료 콘서트를 개최하였고, 그레이트풀 데드와의 작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 작업들은 발매되지 않았다.

81년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5주간의 콘서트와 인권 실태조사 여행 도중 그녀는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아야 했고 죽음의 위협까지 받았다. 이때의 투어는 이듬해에 [There But For Fortune: Joan Baez In Latin America]라는 영화로 TV에 방영되었다. 핵무기 사용 중지 시위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 속에서도 그녀는 밥 딜런과의 LA 공연과 폴 사이먼과의 보스턴 공연, 잭슨 브라운과의 워싱턴 공연 등에 참가하였다.

83년의 유럽 투어를 담은 라이브 앨범 [Live Europe 83]이 유럽과 캐나다에서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프랑스에서 골드를 기록했고, 아카데미 찰스 크로스 어워드에서 '83년의 베스트 라이브 앨범'으로 선정되었다. 그녀는 또한 프랑스에서의 투어 중 콩코르드 광장에서 파리의 비폭력주의에 바치는 무료 콘서트를 개최하여 12만 명의 군중을 모았고, 프랑스 최고의 영예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수상하였다. 이듬해에는 우디 거스리에 대한 다큐멘터리 필름인 [Hard Travellin''에 출연하였고 사운드트랙을 위한 노래를 불렀다.

85년, 그녀는 자신이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던 클럽 47의 25주년 콘서트에 참여하여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을 한다. 이후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 등의 투어를 마친 뒤 69년 이래 처음으로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출연한다.

이후 그녀는 꾸준한 사회 활동과 음악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데, 특히 95년 4월에 뉴욕의 바텀 라인 클럽에서의 실황을 담은 [Ring Them Bells]는 화려한 게스트들과 그녀의 감성이 살아 숨쉬는 멋진 라이브 앨범이었다. 존 바에즈는 아메리칸 포크계의 전설로서, 저항정신을 지닌 모범적인 실천가로서, 그리고 끊이지 않는 창의력과 삶에 대한 열정의 소유자로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밥 딜런이 이야기했다는 "브로드웨이에 죽치고 앉아 '나는 사랑에 빠졌어요' 따위의 노래를 만드는 이들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허나 세상엔 사랑과 섹스 말고도 중요한 것이 존재하는 법입니다."란 말은 여전히 음미할 가치가 있다.

  존 바에즈가 전문적인 음악 교육 없이도 3옥타브를 넘나드는 비브라토의 향연을 펼쳐보일 수 있다거나 하는 것은 그녀의 음악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는 거의 중요치 않은 점이다. 그녀는 늘 현장에서 함께했고, 말뿐인 지성인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자신의 노랫말과 함께 했다. 그녀의 음악이 늘 시대와 동시성을 지닐 수 있었던 것. 그것이 그녀의 노래가 지닌 가장 강한 힘이었다. 그것이 존 바에즈의 노래가 영혼을 움직이는 이유다.




Wild Mountain Thyme - Joan Baez



          Joan Baez Story - III


Joan Baez - 여성 folk singer의 전설  




그녀에게 많은 영향을 준 철학자  Ira Sandperl 과 함께...


This photo was discovered by our Photography Editor Joanne Warfield in her personal effects. To the best of her memory she knew the person on the far left (but could not remember the name) in Carmel, back in the early days hanging out with Joan Baez, Mimi Fariña, Dylan, the Byrds. The inscription on the back reads: “Me, Joan [Baez], John Lennon & Ira [Sandperl] at Beatles’ pad in Hollywood Hills. Aug. ’65.”

In 1957, sixteen-year-old Joan Baez met Gandhian scholar, Ira Sandperl, who became one of her strongest political influences. In the year this photograph was taken she and Ira founded the “Institute For The Study Of Nonviolence” in Carmel Valley, California. After area residents claimed that the onslaught of “hippies and free-love subversives” threatened property values, the Institute closed after one month, only to re-open without incident that December.

UPDATE: Thanks to all the many people who have written with their memories and stories surrounding these people and this time in history. The person on the left has been identified as Dr. William Coleman, Professor of Pediatrics at the Center for Development and Learning,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Chapel Hill. The obvious connection would be between him and Joanne; however, neither can remember meeting the other. We have been in correspondence with both Coleman and his daughter, as well as with the son of Mr. Sandperl, who turned 83 in March and lives in Menlo Park, California.

존 바에즈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미국과 영국의 전통 민요와 발라드, 그리고 종교적인 내용을 담은 흑인 영가와 백인 영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녀의 초기 앨범들은 대부분 17세기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 영국, 또는 미국의 서민층에서 널리 불려졌던 노래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가 차용한 이러한 포크(Folk) 음악들은 동시대 사람들(Folk)에 의해 불려진 시대의 정서와 삶의 애환, 꿈과 이상이 생생히 담긴 지극히 인간적인 노래들이다. 그녀에게 있어 음악이란 삶의 순수한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그릇이며 개인은 물론 집단 의식의 총체적 표출을 가능케 하는 이상적인 도구였다. 때문에 그녀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한 투쟁의 장을 가장 인간적인 향취가 물신 풍기는 포크 음악을 통해 펼쳐보일 수 있었다.

그녀의 음악에서 기교적인 면은 찾아볼 수 없다. 잔잔한 어쿠스틱 기타의 반주에 실리는 하이톤의 소프라노 보컬은 지극히 단조롭지만 동시에 따스한 영적 에너지로 충만한 기운을 가득 내뿜는다. 이것은 바로 그녀 음악의 가장 큰 매력이자 힘이다. 그녀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그 영혼의 울림에 동화되며 그 안에서 스며나오는 강한 메시지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국내에서 존 바에즈라는 이름을 널리 알리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The River In The Pines'나 'Donna Donna', 'Mary Hamilton' 등의 전통 발라드에서 60년대 저항운동의 찬가 'We Shall Overcome', 그리고 'Poor Wayfaring Stranger'와 'Diamonds & Rust' 등에 이르는 수많은 명곡들에서 얻을 수 있는 강한 친화력과 포근히 가슴을 감싸오는 매력은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존 바에즈는 41년 1월 9일 뉴욕의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존 샨도스 바에즈(Joan Chandos Baez)라는 본명으로 태어났다. 멕시코인인 그녀의 아버지는 물리학자였고, 스코틀랜드인 어머니 역시 희곡을 가르쳤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가족들이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로 이사함에 따라 그녀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의 몇 년간을 보내야 했고,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생활했다.

캘리포니아의 팔로 알토에서 보낸 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합창단에서 노래를 했으며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56년, 비폭력주의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2세의 강의를 들은 그녀는 그의 사상에 큰 감명을 받게 되었고, 이듬해에 만난 간디주의 철학자 아이라 샌드펄은 이후 그녀의 정치적 성향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58년 MIT에서 강의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가족은 메사추세츠주로 이사를 하는데, 그녀가 아버지를 따라가서 보았던 보스톤의 한 커피하우스에서의 포크 공연은 결국 그녀를 포크 뮤지션의 길로 인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보스턴과 케임브리지 지역은 우디 거스리와 피트 시거, 오데타 등에 의해 새로운 부흥을 이루게 된 포크 음악의 중심지였고, 보스턴 대학에 입학하여 희곡을 공부하던 그녀는 전공 수업보다는 그곳의 포크 뮤직 씬에 강한 관심을 보이며 지역의 커피하우스와 클럽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존 바에즈가 정식으로 노래와 연주를 시작한 것은 이듬해인 59년 케임브리지의 포크뮤직 클럽인 '클럽 47'에서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포크 뮤지션인 빌 우드를 만나 곧 함께 공연을 하기 시작했고, 얼마 후 빌과 테드 알레비조스라는 뮤지션과 함께 앨범 [Folksingers 'Round Harvard Square]를 발표하며 레코드 데뷔를 이루었다. 공연 기획자인 알버트 그로스만의 눈에 띈 그녀는 시카고의 유명한 포크 클럽인 게이트 오브 혼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2주간의 그 공연은 그녀의 생에 있어 중요한 기회 중 하나였다. 그녀의 재능을 눈여겨보았던 포크 싱어 밥 깁슨이 같은 해 7월 11일 개최된 제 1회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그녀를 자신의 백업보컬로 세운 것이다.

존 바에즈의 예정되지 않았던 출연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그녀의 재능은 쉽사리 눈에 띄었다. 결국 그녀는 이듬해인 60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정식으로 참여하였고, 포크/블루스 전문 레이블인 뱅가드와 12년간의 계약을 맺는다. 이 계약기간 동안 그녀는 여덟 장의 골드 앨범과 한 장의 골드 싱글을 기록하며 60년대의 포크 씬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그녀의 동생인 미미 바에즈(Mimi Baez) 역시 이후 남편인 리처드 파리냐와 함께 듀엣 미미 앤 리처드 파리냐를 결성하여 활동하며 인기를 얻었다).

61년 4월, 존 바에즈는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저즈 포크 시티에서 처음으로 밥 딜런을 만났다. 이후 2년 이상의 기간 동안 자신의 숱한 콘서트를 통해 딜런을 여러 차례 소개했고, 이 두 연인들은 곧 60년대 미국 포크 씬의 거대한 기둥으로 자리잡는다. 61년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한 바에즈는 곧 첫 전국 콘서트 투어에 들어갔는데, 그녀는 이 콘서트를 통해 반 인종차별주의와 흑인의 공민권을 위한 정책을 주장했다.

이 투어는 62년 10월 [In Concert]라는 타이틀로 발매되어 앨범 차트 10위를 기록한다. 이 앨범은 이듬해 그래미 어워즈에서 '베스트 포크 레코딩' 앨범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하였다. 62년 11월 23일자 [타임]지의 커버스토리에 실린 그녀는 이미 사회적으로 커다란 관심을 받는 인물이었다. 63년 5월 17일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에서 개최된 제 1회 몬터레이 포크 페스티벌과 7월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그녀는 밥 딜런과 함께 출연했다. 피트 시거, 미시시피 존 허트, 잭 엘리엇, 이안 앤 실비아, 탐 팩스턴, 필 오크스 등 당대를 대표하는 많은 포크 뮤지션들이 참여한 이때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실황은 [Newport Broadside]와 [The Evening Concert Vol. 1]으로 발매가 되는데, 이 앨범들은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이 함께 등장하는 유일한 작품으로 기록된다.

같은 해 8월, 워싱턴에서 있었던 흑인 공민권을 위한 데모 행진에서 그녀는 25만의 청중 앞에서 'We Shall Overcome'을 불렀고, 이 곡은 곧 싱글로 발매되어 미국 차트 90위와 65년 영국 차트 26위에 올랐다. 밥 딜런이 라이너 노트를 쓴 [In Concert, Part 2](63)는 미국 차트 7위에 올랐고, 6개월 후에는 영국 차트 8위를 기록한다. 특히 이 작품에는 버밍햄의 마일즈 대학에서 녹음된 저항가요 'We Shall Overcome'이 수록되어 있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을 위한 군비 증강의 일환으로 높은 세금을 거두고 있었는데, 수입의 60%를 원천징수 세금으로 빼앗기게 된 존 바에즈가 거기에 불복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이에 저항하는 시위는 물론, 텍사스에서 있었던 반인종차별주의 시위에 참여한다. 그 외에도 그녀는 존슨 대통령에게 베트남에서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촉구하고 흑인 공민권을 위한 자선 콘서트에 참여하는 등 저항의식을 가진 실천가와 영혼의 음악을 들려주는 포크 뮤지션으로서의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완전한 어쿠스틱 앨범으로서는 마지막이 될, 그리고 영국 차트 3위에 오름으로써 영국에서의 최대 히트작인 된 [Joan Baez 5]가 발매되었고, 그녀의 애창곡 66곡과 에릭 폰 슈미트의 삽화가 곁들여진 베스트 셀러 [The Joan Baez Songbook]이 출간되었다. 앨범에 수록된 필 오크스의 곡 'There But For Fortune'은 대중적인 히트를 기록했고, 65년의 그래미 어워즈에서 '베스트 포크 레코딩'에 노미네이트 된다.

65년 봄 바에즈와 딜런의 연인 관계는 끝을 맞이했고, 5월에는 미국 밖에서 행해진 최초의 큰 공연인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의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런던에 머무르는 동안 그녀는 도노반과 함께 베트남전 반대 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되는 [Farewell, Angelina]가 발표되었다.

66년 초, 그녀의 초기 세 장의 앨범들이 미국 레코드산업협회(RIAA)로부터 골드로 인정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반전 시위와 흑인의 인권을 위한 운동에 가담하고 있었으며, 크리스마스에는 64명의 사형선고자들의 감형을 촉구하는 철야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67년 일본 공연에서는 그녀의 정치적 발언이 의도적으로 오역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통역자는 그녀의 정치적 언급을 오역하도록 CIA 요원으로부터 압력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철회하였고 CIA 측은 이 일과의 연관을 부인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예정되었던 워싱턴시 컨스티튜션 홀에서의 공연을 열 수 없었다. 그녀의 극렬한 반전운동 경력 탓이었다.

독립전쟁 참가자의 자손들 모임인 '미국애국부인회'에서 그녀의 공연 허가를 거부했던 것이다. 하지만 존 바에즈는 30,000여 명의 청중이 모인 워싱턴 기념비 앞에서 무료 콘서트를 개최함으로써 멋지게 응수했다. 7월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참여한 그녀는 이어 8월에 새로운 앨범 [Joan]을 발표한다. 10월에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군 입소대 입구를 점거한 혐의로 체포되어 10일간의 형을 받기도 했다. 68년 3월 26일, 존 바에즈는 캘리포니아주 팔로 알토의 평화와 자유 공동체 리더이자 행동주의자인 데이빗 해리스와 결혼했다. 이후 그녀의 회고록 [새벽(Daybreak)]가 출간되어 베스트셀러를 기록한다. 69년, 데이빗 해리스가 징병 기피로 3년형을 선고받았고 그는 20개월을 복역해야만 했다.

존은 감옥에 있는 남편에게 바치는 [David's Album]을 발표하여 차트 36위에 올렸고, 8월에 있었던 역사적인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71년에는 그녀와 데이빗이 함께 쓴 책 [Coming Out]이 출간되었으며 사운드트랙 앨범 [Carry It On]이 발매된다. 10월 그녀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그리스의 저항운동을 위한 콘서트를 열었는데, 거기에는 그리스의 유명한 영화감독인 쥘 다생과 그의 아내이자 그리스 최고의 여배우인 멜리나 메르쿠리가 참여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또 다른 사운드트랙 앨범 [Sacco And Vanzetti]는 존과 이탈리아의 유명한 영화음악가인 엔니오 모리코네가 함께 작곡한 작품이었다. 이후 뱅가드 레이블에서의 마지막 앨범인 [Blessed Are..]가 발매되었고, 밴드(Band)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싱글 '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이 차트 3위에 오르며 밀리언셀러를 기록한다. 72년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최고의 여성 보컬리스트로 노미네이트 되었다. 뱅가드 레이블을 떠난 그녀의 새 보금자리는 A&M이었다.

뱅가드 시절의 전통 포크의 모습은 이제 많은 변화를 겪었고 그녀의 음악 스타일 또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72년 5월 A&M에서의 첫 앨범 [Come From The Shadows]는 미국 차트 48위에 오른다. 앨범에서 커트된 싱글 'In The Quiet Morning'은 그녀의 동생 미미 파리냐의 작품으로 재니스 조플린에게 바치는 곡이었다. 이 곡은 차트 69위를 기록한다. 74년 스페인어로 부른 앨범 [Gracias A La Vida]가 발매되었다. 앨범 발매 후 그녀는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 이스라엘, 레바논, 튜지니아, 아르헨티나 등을 포함한 세계 투어에 들어간다. A&M 시절의 최고작인 [Diamond & Rust]는 72년 4월에 발매되었다. 조지아 주의 아틀랜트시는 8월 2일을 '존 바에즈의 날'로 정하고 그녀에게 영예를 주었다. 그녀는 75년 10월부터 밥 딜런과 믹 론슨, 로저 맥귄, 자니 미첼 등으로 이루어진 롤링 썬더 리뷰와 함께 미국 투어를 시작하여 이듬해에 발표된 더블라이트 세트인 [From Every Stage]로 결실을 맺는다. 76년 말, 그녀의 자작곡으로만 이루어진 최초의 앨범 [Gulf Winds]가 발매되었고 밥 딜런과의 두 번째 투어를 시작한다. 이듬해의 스페인 투어 도중 그녀는 40년간의 군부독재의 종말을 코앞에 둔 독재자 프란치스코 프랑코의 금지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TV 생방송에 출연하여 'No Nos Moveran(We Shall Not Be Moved)'를 불러 화제가 되었다.

79년, 그녀의 자작곡과 직접 그린 스케치들이 담긴 책 [The Songbook And Then I Wrote...]가 출간되었다. 같은 해 [Honest Lullaby]가 발매되었고, 그녀는 샌프란시스코만 지역 음악 시상식에서 78년 최고의 여성 보컬리스트로 선정되었다. 그해 그녀는 인권기구인 인본주의 국제인권위원회를 설립하고 이후 13년 동안 회장직을 맡아 활동한다. 위원회의 첫 번째 행동은 미국 내 다섯 개의 메이저 신문에 베트남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권탄압의 내용을 규탄하는 내용의 글을 게재하는 것이었다. 이 위원회와 KRON-TV,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신문은 캄보디아 긴급 구조 기금을 결성하여 100만 달러 이상의 기금을 모았다.

바에즈는 80년 정치적 행동과 음악의 보편성으로 앤티오크 대학과 루트거스 대학에서 명예인문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같은 해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파리 노트르담 사원 앞에서 무료 콘서트를 개최하였고, 그레이트풀 데드와의 작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 작업들은 발매되지 않았다. 81년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5주간의 콘서트와 인권 실태조사 여행 도중 그녀는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아야 했고 죽음의 위협까지 받았다. 이때의 투어는 이듬해에 [There But For Fortune: Joan Baez In Latin America]라는 영화로 TV에 방영되었다. 핵무기 사용 중지 시위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 속에서도 그녀는 밥 딜런과의 LA 공연과 폴 사이먼과의 보스턴 공연, 잭슨 브라운과의 워싱턴 공연 등에 참가하였다.

83년의 유럽 투어를 담은 라이브 앨범 [Live Europe 83]이 유럽과 캐나다에서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프랑스에서 골드를 기록했고, 아카데미 찰스 크로스 어워드에서 '83년의 베스트 라이브 앨범'으로 선정되었다. 그녀는 또한 프랑스에서의 투어 중 콩코르드 광장에서 파리의 비폭력주의에 바치는 무료 콘서트를 개최하여 12만 명의 군중을 모았고, 프랑스 최고의 영예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수상하였다. 이듬해에는 우디 거스리에 대한 다큐멘터리 필름인 [Hard Travellin''에 출연하였고 사운드트랙을 위한 노래를 불렀다. 85년, 그녀는 자신이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던 클럽 47의 25주년 콘서트에 참여하여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을 한다. 이후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 등의 투어를 마친 뒤 69년 이래 처음으로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출연한다. 이후 그녀는 꾸준한 사회 활동과 음악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데, 특히 95년 4월에 뉴욕의 바텀 라인 클럽에서의 실황을 담은 [Ring Them Bells]는 화려한 게스트들과 그녀의 감성이 살아 숨쉬는 멋진 라이브 앨범이었다. 존 바에즈는 아메리칸 포크계의 전설로서, 저항정신을 지닌 모범적인 실천가로서, 그리고 끊이지 않는 창의력과 삶에 대한 열정의 소유자로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다.
출처 : 아름다운 날들
글쓴이 : 베가 원글보기
메모 : 조안 바에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