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듣기/팝

[스크랩] No Woman No Cry - Bob Marley

Sidonio 2006. 12. 11. 18:41

 No Woman No Cry - Bob Marley

 

 

위대한 흑인 '밥 말리(Bob Marley)'의 런던 레인보우 극장에서의 실황입니다.
흑인 여성들의 아픔을 껴않으며 그들에게 희망을 보내는 곡입니다.

No Woman, No Cry. 여성이여, 울지 말아요.

 

 

 영상을 통해 밥말리의 모습이 왠지 고통스러워 보일 것 입니다. 그는 암에 걸린 상태에서 치료을 거부한체 공연중인 상태랍니다. 그래서 더더욱 고통스러워 보이고 초췌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념과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흑인들의 미래의 희망을 위해 자신의 고통과 투쟁중인 모습이랍니다.

 

 

'음악으로써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들을 깨우치고 선동하고 미래에 대해 듣게 할 수는 있다.'(Bob Marley)


 

No Woman No Cry - Bob Marley
번역 : rushcrow (@naver)


No, woman, no cry
No, woman, no cry ..

여성이여 울지말아요..


Said - said - said: I remember when we used to sit
              in the government yard in Trenchtown,
Oba - observing the 'ypocrites
             As they would mingle with the good people we meet.
Good friends we have, oh, good friends we've lost
             Along the way.

정부 기관 마당의 트랜치 타운에서 나는 우리가 앉아 있곤 했던 때를 기억해요
우리가 만난 좋은 사람들과 섞여서 위선자를 관찰했어요
가는 도중에 우리가 가진 좋은 친구들, 오, 우리가 잃은 좋은 친구들


In this great future, you can't forget your past;
So dry your tears, I say.

이 위대한 미래에, 당신은 과거를 잊을 수 없어요;
그래서 당신의 눈물을 닦으라고 나는 말해요


No, woman, no cry;
No, woman, no cry.
'Ere, little darlin', don't shed no tears:
No, woman, no cry.

여성이여 울지 말아요
여성이여 울지 말아요
어여쁜 소녀여, 눈물을 흘리지 말아요
여성이여 울지 말아요


Said - said - said: I remember when-a we used to sit
             In the government yard in Trenchtown.
And then Georgie would make the fire lights,
             As it was logwood burnin' through the nights.
Then we would cook cornmeal porridge,
             Of which I'll share with you;

정부 기관 마당의 트랜치 타운에서 나는 우리가 앉아 있곤 했던 때를 기억해요
그리고 조지는 밤 새도록 로그우드(장미목의 나무)를 태울 것 처럼 불을 피웠지요
그러면 우리는 당신과 함께 나눌 밀가루 포리지를 요리했어요


My feet is my only carriage,
So I've got to push on through.
But while I'm gone, I mean:

나의 두 발이 나의 유일한 운송 수단이예요
그래서 나는 밀고 나가야 했지요
그러나 내가 간 동안, 그러니까:


Everything's gonna be all right!  ....
I said, everything's gonna be all right-a!
Everything's gonna be all right, now!

모든 것이 잘 될 거예요 ..
난 말했어요 모든 것이 다 잘될 거예요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예요, 이제는

So, woman, no cry;
No - no, woman - woman, no cry.
Woman, little sister, don't shed no tears;
No, woman, no cry.

그러니까 여성이여 울지말아요
노, 노 여성이여, 여성이여, 울지 말아요
여성이여, 자매여, 눈물을 흘리지 말아요
여성이여 울지 말아요

 

 

1980년 9월 23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의 스탠리 극장.

쏟아지는 불빛과 환호 속에 한 남자가 서 있다. 전신에 암이 퍼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무대에 올랐다. 밥 말리의 ‘마지막 콘서트’였다.

 

2박자, 4박자를 강조한 경쾌한 비트의 레게음악에 그는 공격적인 노랫말을 실었다. 그는 노래의 가치를 굳게 믿었다. 서방세계에 말리는 ‘위험한 아티스트’로 알려졌으나 폭정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그의 노래는 ‘희망’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대기를 집필하는 스티븐 데이비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진 건 분노가 아니라 진실이다. 진실은 강물처럼 남자를 길들인다.”

 

말리는 중년의 영국인 아버지와 10대의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향은 자메이카의 가난한 시골마을. 가족을 돌보는 데 관심이 없었던 아버지는 말리가 열 살 때 심장마비로 숨졌고 모자(母子)는 빈민촌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한 삶속에서 말리가 본것은 자메이카의 비인권적인 흑인차별 정책들 그리고 뿌리깊게 내린 인종차별 정책들이였다.

 

말리는 14세 때 학교를 관두고 대장간에서 일을 시작했다. 짬이 날 때는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만들었다. 1963년 말리와 친구들은 ‘웨일러스’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그는 밴드의 리더이자 가수, 작곡자였다.

 

영국의 아일랜드 레코드사를 통해 1973년 데뷔앨범 ‘캐치 어 파이어(Catch a Fire)’를 발표해 세계에 자메이카 토속음악 레게를 알렸다. 1975년 작 ‘노 우먼, 노 크라이(No Woman, No Cry)’는 지금도 레게의 클래식으로 사랑받고 있다.

 

1977년 유럽투어 때 말리는 프랑스 기자들과 축구경기를 했다. 발에 부상을 입어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암세포를 발견했다. 그러나 수술을 거부했다. 수술이 음악활동에 영향을 미칠까 우려해서였다.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말리는 1978년 세계 투어를 강행했다. 같은 해 고향 자메이카에서 평화를 위한 콘서트를, 미국 보스턴에서 흑인 자유 투사를 위한 자선공연을 가졌다.

 

1980년 다시 투어에 나선 그는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조깅을 하다가 쓰러졌다. 암은 뇌와 폐, 심장까지 퍼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피츠버그의 마지막 무대에 섰고, 1981년 5월 세상과 작별했다.

장례는 자메이카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레게의 전설’은 깁슨 기타와 축구공, 마리화나, 성경책과 함께 고향마을에 묻혔다. 

 

 “레게, 힙합 등 흑인음악은 자유분방함이 핵심이기 때문에 스스로 새로운 것을 찾아가며 체득하며 불합리에 대해 저항 하는 음악으로서 우리을 기억하게 만든 밥말리을 영원희 기억하며....."

 

출처 : 따식이의 연결장소
글쓴이 : 따식아 밥묵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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