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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시인 김민부

Sidonio 2008. 5. 24. 09:41

천재시인 김민부에 대한 글을 읽고.

널리 알리기 위해 이곳에 옮겨 놓습니다....

 

다음의 신지식에서 옮겨왔습니다.

 

 

 

[20세기를 살다간 부산문학인] (2) 김민부

너무 일찍 피어나 너무 일찍 진 꽃

부산고1년때 등단 60편의 시 남기고 31세에 애석한 요절

부산일보 1999/11/19일자 017면 서비스시간: 09:15:25

 

 

시인은 가도 노래는 남는 걸까?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빨래 소리 물레 소리에 눈물 흘렸네."우리 가락이 살아있는 장일남 작곡의 "기다리는 마음" 1절 노랫말이다.송도 암남공원 가는 길목.푸른 비단결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서 영도 봉래산을 비켜나며 해가 뜨고 달이 뜨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는 망부석같은 시비가 있다."기다리는 마음"을 쓴 김민부(사진.1941~1972)의 시비이다.

시인 김민부는 너무 일찍 피어난 꽃이었으며,너무 일찍 진 꽃이었다.

 

72년이 기울던 10월의 어느 날,연말특집 방송원고 3천장의 부담감에 예민해 있던 그는 집안일로 불편한 심기가 돼 석유난로를 발로 찼다고 한다.그의 집은 불탔고,그때 입은 화상으로 그는 이틀 뒤 숨을 거뒀다.많은 친우들이 "천재 시인의 때이른 죽음"이라고 표현하는 31세의 애석하고 아까운 요절이었다."둔중한 몸피,소탈한 외모와는 달리 정결한 감성을 지닌 시인"(시인 박응석의 말)은 이 땅에 잠시 머문 동안 고작 60편의 시만 남기고 떠난 것이다.

 

그가 문단에 나온 것은 15세 때(부산고교 1년).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석류"가 입선됐다.다음 해에 첫 시집 "항아리"를 냈고,17세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균열"이 당선됐다.미당 서정주가 "그 시 참 좋다!"고 흡족해했던 시다.그 일부다."달이 오르면 배가 곯아/배 곯은 바위는 말이 없어 할 일 없이 꽃 같은 거/처녀 같은 거나 남 몰래 제 어깨에다/새기고들 있었다."

 

소설가 최해군씨의 말."고교 때 김민부는 경향 각지의 백일장을 휩쓸었어요.머리가 좋았어요.재재발랐죠." 김민부의 부친 김상필씨는 "민부는 고교 때 시 쓰기를 이미 마쳤다"고 말할 정도이다.그런 김민부의 소질은 암울했던 50년대말 부산 시단을 충격했다.하지만 부산 문단에 대한 그의 충격은 충격으로 머물렀다.

 

서울의 서라벌 예대와 동국대에서 유학한 뒤 21세 때부터 부산에서,그 다음엔 서울에서 방송작가 생활을 한다.부산에서 초기 "자갈치 아지매" 원고를 쓰는 등 탁월한 문재로 방송가에서 매일 2백장의 원고량을 메우는 인기작가였다.하지만 그건 그에게 "이탈"이었다.친우들에게 그는 "진실로 참글을 쓰고 싶다,단 한 편만이라도"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러던 가운데 68년 27세때 두번째 시집 "나부와 새"를 냈다.전통 서정을 노래하던 그는 이제 번뜩이는 재능을 모던한 필치로 변모시켜 존재와 심연에 육박하면서,어둠과 죽음을 남김없이 읊는다."나는 때때로 죽음과 조우한다/조락한 가랑잎/여자의 손톱에 빛나는 햇살/찻집의 조롱속에 갇혀 있는 새의 눈망울/그 눈망울 속에 얽혀 있는 가느디가는 핏발/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창문에 퍼덕이는 빨래,/죽음은 그렇게 내게로 온다"("서시" 일부).

 

그는 그 시집의 후기에 "가을이 올 때마다 나는 내 목숨을 줄이더라도 몇 편의 시를 쓰고픈 충동에 몸을 떨었다"라고 적었다.그의 계절이었던 가을도 이제 자취를 거두고 있다.그는 지금 어디에서 빨래 소리 물레 소리에 눈물 흘리고 있을까? 최학림기자 theos@pusanilbo.com